- 이상진 (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중앙회장)
- 입력 2024.05.14 09:10
이상진 (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중앙회장)
이상진 (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중앙회장)
[시정일보] 북한산 자락에 있어 주변을 걷기에도 좋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도 가다듬을 겸해서 지난 달 말에 몇몇 동료들과 민주주의 성지, 국립 4.19 민주묘지를 방문했다. 역시 새순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묘역 주변은 방문한 사람들도 많고 녹음이 우거져 부담 없이 걷는데 적당했다.
4.19시민혁명이 일어난 것은 1960년 4월 19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사건이다. 우리는 그동안 민주주의 정착과 실현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본다. 이념의 스팩트럼에 따라 좌익 우익으로 나뉘어진 진영간의 시각차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상대의 의견은 들으려조차 하지 않는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우리의 이념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방되는 날부터 이념으로 갈렸다. 이것은 독립운동 자체가 이념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독립 후 만들어 갈 나라에 대한 생각이 달라 결국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전쟁도 치렀다. 피해는 엄청났고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기도 전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국민들의 생활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전쟁이 왜 일어났고 다시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국민의 뜻을 모아야 할 그런 때였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독재정치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에서 신임을 얻지 못하자 대통령 선거를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어 2대 대통령이 되었고, 초대 대통령에게는 중임제한을 없앤다는 무리수까지 두며 3대 대통령을 하더니, 4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3.15 부정선거까지 감행하게 된다.
이에 국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폭로하며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는 순수한 중고등학생들이 앞장섰고 뒤이어 대학생들이 그리고 교수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번졌다.
원래 민주주의는 개인의 안전과 표현의 자유, 의사결정에서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작동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생명권, 자기 결정권 보장,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 보장을 전제로 한다. 원래 사회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미덕이나 악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인격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사회를 진보와 보수 혹은 선과 악의 진영으로 나누며, 이제는 이념이나 가치관도 무시하고 니편 내편으로 갈리어 갈등하고 있다. 사회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점은 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미덕이 개인의 마음 속에 자라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개인들이 자기 존중과 권리의식 책임의식에 바탕을 둔 상태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사안들을 숙의하고 토론하며 탐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없이 복잡한 사안을 정치가나 전문가에게 위임하게 된다면 언제나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서 인물중심의 선거, 미디어에 많이 알려진 셀럽에게 투표하는 희극적이지만 비극의 정치판이 계속될 것이다.
산에서 보는 서울의 풍광은 참으로 아름답다. 산이 아름다운 것은 여러가지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들이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곧은 나무 굽은 나무 어느 것 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다.
이상진 (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중앙회장)
[시정일보] 북한산 자락에 있어 주변을 걷기에도 좋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도 가다듬을 겸해서 지난 달 말에 몇몇 동료들과 민주주의 성지, 국립 4.19 민주묘지를 방문했다. 역시 새순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묘역 주변은 방문한 사람들도 많고 녹음이 우거져 부담 없이 걷는데 적당했다.
4.19시민혁명이 일어난 것은 1960년 4월 19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사건이다. 우리는 그동안 민주주의 정착과 실현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본다. 이념의 스팩트럼에 따라 좌익 우익으로 나뉘어진 진영간의 시각차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상대의 의견은 들으려조차 하지 않는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우리의 이념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방되는 날부터 이념으로 갈렸다. 이것은 독립운동 자체가 이념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독립 후 만들어 갈 나라에 대한 생각이 달라 결국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전쟁도 치렀다. 피해는 엄청났고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기도 전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국민들의 생활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전쟁이 왜 일어났고 다시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국민의 뜻을 모아야 할 그런 때였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독재정치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에서 신임을 얻지 못하자 대통령 선거를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어 2대 대통령이 되었고, 초대 대통령에게는 중임제한을 없앤다는 무리수까지 두며 3대 대통령을 하더니, 4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3.15 부정선거까지 감행하게 된다.
이에 국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폭로하며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는 순수한 중고등학생들이 앞장섰고 뒤이어 대학생들이 그리고 교수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전국으로 번졌다.
원래 민주주의는 개인의 안전과 표현의 자유, 의사결정에서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작동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생명권, 자기 결정권 보장,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 보장을 전제로 한다. 원래 사회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미덕이나 악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인격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사회를 진보와 보수 혹은 선과 악의 진영으로 나누며, 이제는 이념이나 가치관도 무시하고 니편 내편으로 갈리어 갈등하고 있다. 사회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점은 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미덕이 개인의 마음 속에 자라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개인들이 자기 존중과 권리의식 책임의식에 바탕을 둔 상태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사안들을 숙의하고 토론하며 탐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없이 복잡한 사안을 정치가나 전문가에게 위임하게 된다면 언제나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서 인물중심의 선거, 미디어에 많이 알려진 셀럽에게 투표하는 희극적이지만 비극의 정치판이 계속될 것이다.
산에서 보는 서울의 풍광은 참으로 아름답다. 산이 아름다운 것은 여러가지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들이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곧은 나무 굽은 나무 어느 것 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다.